광릉(1/2)_왕릉(제7대 세조)_'09.09 ♣ 국내여행_유적지 찾아서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1417년(태종 17) 9월 29일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대군 시절,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으며, 1452년(문종 2)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측근인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다.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시키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 정비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조는 이와 같은
많은 치적을 세워 조선 초기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한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선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유배지에서 죽이는 등 수많은 정적의 피를 보았다.





수라간(水라間)터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곳으로 현재 건물은 없어지고
그 기초석 일부가 남아있다.
1910년에 찍은 수라간 사진(국립박물관 소장)에는 건물이 남아 있었는데.....



왕릉전경~~~~~~~~~~



정자각



신도비~~~




12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이 진짜로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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