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3/3)_비림, 길상탑(보물1242호), 원경왕사비(보물128호), 영지, 당간지주 ♣ 국내여행_유적지 찾아서

일주문 밖의 당간지주와 연못같은 시설이.....







고사목 枯死木

이 나무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년)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왕후의
난치병이 완치되자 왕이 이 은덕에 보답코자 법당과 승료등 많은 가람을 헌공하여 해인사를 
창건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느티나무는 1,200여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해인사와 더불어 성장하여 오다가 1945년에 수령을 다해 고사하고, 지금은 
둥치만 남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해인사 비림碑林






길상탑海印寺吉祥塔(보물1242호)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
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바닥돌 위에 아래층 기단을 받고, 윗면에 얇은 괴임을 새긴 후 위층 기단을 얹었다. 위층 기단은 하나의 돌로
짜여져 다른 탑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탑신은 1층의 몸돌이 2·3층의 몸돌보다 크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각 층 모두 5단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네모난 받침돌만 남고 모두 없어진 상태이며, 받침돌 윗면에 철주를
꽂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중 조그만 탑이 157개가 있으나, 소탑은 원래
99개, 77개를 두는 것이 원칙이므로 19개는 없어진 듯 하다.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塔誌)는 4장인데,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에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5)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소탑(小塔)으로,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원경왕사비元景王師碑(보물128호)

원경왕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로, 반야사의 옛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에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었는데,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색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9년(1104)에 승통(僧統)이
되었다. 예종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고 그 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고려 인종 3년(1125)에 만들어진 이 비는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지影池

가야산의 정상이 이 연못에 비친다하여 "영지影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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