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 용운의 묘_'09.1.24 ♣ 국내여행_유적지 찾아서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홍성(洪城) 출생.

6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자 피신하여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5년 인제(麟蹄)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 법을 받았다. 1908년 전국사찰대표 52명의 한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의 국치(國恥)를 참지 못하여 중국으로 망명, 독립군군관학교를 방문한 뒤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같은 해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불교정신을 널리 펴는 데 힘썼다. 1918년 월간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간행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고 문학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 중앙집행위원
으로 경성지회장을 지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월간 《불교(佛敎)》지를 인수하여 속간하였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
(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뒤 계속하여 불교의 혁신운동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시에 있어서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하였으며, 은유법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
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주요 작품·저서로 《박명(薄命)》 《흑풍》, 시집 《님의 침묵》 및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등이 있다.


<망우리에 있는 한 용운 선생의 묘>


선생이 돌아가시자, 유해는 불교의 관례대로 화장하였다. 당시 홍제동 화장터는 일본인들이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김동삼 선생 장례를 치루기도 했던 한국인이 경영하는 미아리의 조그마한
화장터에서 조촐하게 엄수되었다. 이때 모두 소골(燒骨)이 되었으나 오직 치아만이 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불가에서는 치아의 출현을 매우 귀하게 여기고 있으므로 모두 선생의 깊은 법력(法力)에
감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을 뜻하는 무슨 길조(吉兆)가 오리라는 희망에 부푼 가슴을 떨면서
깊이깊이 합장하였다. 이 치아는 항아리에 담겨져 유골과 함께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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