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08일
양평 지장사, 한음 이덕형 영정각, 신도비, 묘소_'09.11.7
청계산(양평) 지장사



한음 이덕형 漢陰 李德馨
한음 이덕형(1561~1613)은 이름만 나오면 바로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과 연결되는 학자요,
문인이었다. 겸하여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던 정치가로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해 오성과 한음이라는 두 정치가의 충성심과
지혜 때문에 망하기 직전의 나라가 중흥(中興)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음은 현재까지의 정설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백사 이항복(1556~1618)은 한음의 5세 연상이었고, 한음보다 5년 뒤에 63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음보다 10년을 더 살았던 분이다. 한음 연보의 기록으로 보면 한음이 18세인 때 23세의 오성과
친구로서의 사귐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만난 친구가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우정을 키우면서 죽는 날까지 서로를 가장 잘 알아주던 지기(知己)였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과
협력 때문에 위기에 처한 나라가 건져질 수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의 우정과 지혜의 공유만으로도
한 편의 역사서가 이룩될 수 있는 멋진 자료다. 이 나라의 역사에 그런 멋진 인간관계가 실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조금 높은 지위에 있다는 사람들, 조금 학식이 있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일수록 서로를
시기하고 반목하거나, 어느 새 서로를 등지며 불화와 배신을 일삼으며 추악한 비방과 악담으로 조용할
날 없이 싸움질만 하는 사례를 볼 때, 오성과 한음의 멋진 우정의 유산은 정말로 값지고 본받아야 할 시
대적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성의 유적지를 찾은 다음 바로 한음의 생애를 되짚어 보면서 그의
유적지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인들이 권력을 농단하면서 광해군의 패악스러운 정치가 계속되자 강력히 항의하던 한음 이덕형은 탈관
삭직되어 사제(私第)가 있던 당시의 광주(廣州) 땅,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사제(莎堤) 마을에서
칩거하고 있다가 병이 도져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광해군의 패정에 항의하다가 양주의 노원(蘆原)에
물러나 있던 오성대감 이항복은 한음의 부음을 듣고 곧바로 사제로 찾아가 유가족들과 함께 곡(哭)하고
한음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그들은 아름다운 정을 잊지 않았으며,
무덤 속에 넣은 한음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백사는 한음의 높은 학덕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일로 그들의
우정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한음 이덕현 선생 영정각



신도비





한음 이덕형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와 집터임을 알려주는 유허비(오른쪽).

한음의 신도비명을 한글로 번역한 비문을 새긴 기념비



한음 이덕형 漢陰 李德馨
한음 이덕형(1561~1613)은 이름만 나오면 바로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과 연결되는 학자요,
문인이었다. 겸하여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던 정치가로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해 오성과 한음이라는 두 정치가의 충성심과
지혜 때문에 망하기 직전의 나라가 중흥(中興)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음은 현재까지의 정설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백사 이항복(1556~1618)은 한음의 5세 연상이었고, 한음보다 5년 뒤에 63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음보다 10년을 더 살았던 분이다. 한음 연보의 기록으로 보면 한음이 18세인 때 23세의 오성과
친구로서의 사귐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만난 친구가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우정을 키우면서 죽는 날까지 서로를 가장 잘 알아주던 지기(知己)였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과
협력 때문에 위기에 처한 나라가 건져질 수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의 우정과 지혜의 공유만으로도
한 편의 역사서가 이룩될 수 있는 멋진 자료다. 이 나라의 역사에 그런 멋진 인간관계가 실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조금 높은 지위에 있다는 사람들, 조금 학식이 있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일수록 서로를
시기하고 반목하거나, 어느 새 서로를 등지며 불화와 배신을 일삼으며 추악한 비방과 악담으로 조용할
날 없이 싸움질만 하는 사례를 볼 때, 오성과 한음의 멋진 우정의 유산은 정말로 값지고 본받아야 할 시
대적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성의 유적지를 찾은 다음 바로 한음의 생애를 되짚어 보면서 그의
유적지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인들이 권력을 농단하면서 광해군의 패악스러운 정치가 계속되자 강력히 항의하던 한음 이덕형은 탈관
삭직되어 사제(私第)가 있던 당시의 광주(廣州) 땅,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사제(莎堤) 마을에서
칩거하고 있다가 병이 도져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광해군의 패정에 항의하다가 양주의 노원(蘆原)에
물러나 있던 오성대감 이항복은 한음의 부음을 듣고 곧바로 사제로 찾아가 유가족들과 함께 곡(哭)하고
한음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그들은 아름다운 정을 잊지 않았으며,
무덤 속에 넣은 한음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백사는 한음의 높은 학덕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일로 그들의
우정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한음 이덕현 선생 영정각



신도비





한음 이덕형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와 집터임을 알려주는 유허비(오른쪽).

한음의 신도비명을 한글로 번역한 비문을 새긴 기념비
# by | 2009/11/08 14:11 | ♣ 국내여행_유적지를 찾아서 | 트랙백 | 덧글(0)












